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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교육·사상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중 신라는 가장 후진성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7세기 이후에는 한반도의 원산만 이남 일대를 지배하게 된다. 통일신라의 핵심적 위치였던 경주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8세기~9세기는 신라문화의 찬란한 전성기였다.
신라의 화랑정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 후에도 한국인들의 정신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신라문화의 유산은 신라의 옛 터인 경주를 중심으로 폭넓게 산재해 있으며, 특히 유네스코가 세계 10대 유적 도시로 지정한 것으로 보아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그 유물의 종류와 가치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우리의 사상과 종교·학문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는데, 해동불교의 조종(祖宗)이라 불리는 원효(元曉), 의상(義湘)대사와 이두(吏讀)를 집대성한 설총(薛聰), 그리고 최치원, 김유신 등은 신라에서 배출된 인재들이다.
고려시대에는 비록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기는 했으나 경주는 여전히 전 왕조의 서울로 존중받았으며, 신라인들은 고려조의 다방면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의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한 최승로은 경주출신으로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갔으며,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손이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의 대가인 회재(晦齋) 이언적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교육기관을 세워서 유학교육에 전념하였다.
근대에는 우리 고유의 종교인 동학(東學)이 창시되었는데 그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도 경주인이다. 동학의 사상은 동학농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3·1운동의 근원적 추진력이 되었으며,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이 신라의 수도 경주 지역은 한민족과 한문화와 한국사가 형성한 거의 모든 분야의 뿌리이며, 문화 사상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경주 지역은 우리 민족의 역사 발전사에 있어서 ‘인재의 곳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교육 등 전반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오늘날 경주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물은 민족의 정신이 살아 있는 교육장으로 후손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1. 통일신라의 발전
통일신라는 전 시대보다 3배로 늘어난 영토를 조직적·능률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한 지배체제의 정비 및 개편과 새로운 문화 창조에 힘썼다. 이에 따라 왕경 경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왕궁과 그 주변의 제 시설에 대한 정비는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본격화되었는데 문무왕 14년(674)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나당 전쟁이 열기를 더해가던 시기 문무왕은 오히려 안압지(雁鴨池)를 조성하고 왕궁을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라 중대 왕실의 권위를 대내외에 천명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된다. 문무왕은 이 밖에도 사천왕사를 완성하고 남산성을 증축했다.《문무대왕과 민파식적 : 감은사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경주에서는 34km, 포항에서는 32km이다. 절터의 동쪽 동해바다 가운데 있는 대왕암이 바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30대 문무대왕의 해중릉(海中陵)이며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문무왕은 재위한 지 21년 만인 681년 세상을 떠났는데 늘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간(世間)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이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佛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라고 말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했고 신라의 강토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냈던 불세출(不世出)의 영주(英主) 문무왕은 동해구(東海口)에 가람(伽覽)을 세워 불력(佛力)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다. 그러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왕이 돌아 가셨으므로, 그의 유언(遺言)에 따라 화장(火葬)한 후 동해에 안장(安葬)하였던 것이다.
일국의 군왕으로서 사치와 영화를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죽어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노고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화장하여 산골(散骨)할 것을 당부한 유조(遺詔)는 그 탁월한 인품을 짐작케 해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신이 신문왕을 거쳐 이후 경덕왕 대에 이르는 동안 신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융성과 번영을 누리고 찬란한 민족문화의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신문왕은 등극하면서 곧 부왕의 뜻을 받들어 선조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역사를 진행시켜 즉위하던 해(681) 절을 이룩하여 감은사라고 했다.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이 된 부왕이 조수(潮水)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감은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쌍탑(雙塔)이 배치된 전형적인 통일신라기의 양식에 따라 건축되었다.
절을 낙성한 후 신문왕은 이곳에서 신비스러운 피리를 얻었다고 한다. 해관(海官)이 아뢰기를 “동해안에 작은 섬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합니다.”하였다. 왕이 이상히 여겨 점을 치게 했더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문무대왕과 김유신공의 두 성인께서 나라를 지킬 보물을 주실 징조입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이견대(利見台)에 가서 바다를 살폈다. 이튿날 산 위에 있던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컴컴해 지더니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자 용이 대나무로 된 피리를 바쳤다.
그 피리를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며, 홍수 질 때는 비가 개었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효소왕 때에는 행방불명이 되었던 부례랑(夫禮郞)이 피리를 불자 살아 돌아왔으므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출전 : 『삼국유사』》신문왕은 중앙관부에 예작부(例作府)와 공장부(工匠府)를 설치, 당나라 6전(典) 조직과 비슷한 정무(政務)분담형식의 집사부(執事部) 이하 14관부를 완성하여 일원적 지배체제를 이룩하였다. 지방제도에 있어서는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그 밑에 군(郡)·현(縣)을 두었으며, 요소에 5소경(小京)을 두어 이곳에는 서울인 경주와 같이 6부제를 실시하고 왕이 때때로 순주(巡駐)하였다. 그리고 지방세력의 억제책으로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실시하고 689년에는 녹읍제(祿邑制)를 폐지하였다.
신라는 통일 후 120여 년 간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 오늘날 안압지·임해전·포석정 등이 당시 상류사회의 호화로운 한 모습을 전하여 주고 있다.
경덕왕 19년(760) 2월에는 궁중에 큰 못을 파고, 문천에 월정교(月精橋)와 춘양교(春陽橋)를 건설하였다. 이 무렵 왕경 경주는 당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하여 바둑판같은 도로망으로 짜여진 정연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경주의 논밭 사이의 둑이 정연한 것은 바로 그 도로망의 유구일 것임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왕도는 길이가 3,075보, 너비가 3,018보였으며, 35리와 6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진한조」에서는 신라 전성시대 경중(京中)에 178,936호, 1,360방, 55리, 35 금입댁(金入宅)이 있었다고 한다.
《불국사·석굴암 창건 설화 : 김대성은 재상을 지낸 문량의 아들이었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생와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그는 경주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집 여자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죽은 날 밤 그는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전생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다 살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고 환생하여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한다. 이 설화는 당시 신라인에게 불교의 업보윤회사상(業報輪廻思想)이 많이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來世)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 출전 : 『삼국유사』》2. 신라사회의 모순
경덕왕 시기는 통일신라의 최전성기이도 하지만 또한 몰락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경덕왕의 뒤를 이은 혜공왕대는 커다란 격동의 시기였다. 신라 진골 귀족들의 왕권도전이 표면화하여 혜공왕 4년(768) 김대공(金大恭)의 난을 시발로 96각간(角干)에 의한 반란이 3년간 계속되다가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金良相)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신라 하대의 첫 왕이다.
《경덕왕 설화 : 경덕왕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니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어느 날 왕은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했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했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다시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경덕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왕(惠恭王)이다. 나이가 매우 어린 때문에 태후(太后)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죽음을 당했다.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한다. 출전 : 『삼국유사』》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족당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왕권의 강화책으로 골품에 의한 소수 귀족의 관직독점을 방지하고 관리를 인재 본위로 등용하기 위해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科擧의 일종)를 설치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는데, 이는 내물왕계의 원성왕이 왕위를 이으면서부터 무열왕계의 반격이 개시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원성왕 즉위 설화 : 원성왕(元聖王)의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으로 원래 이찬 김주원(金周元) 밑에서 각간 벼슬을 하였다. 하루는 김경신이 잠을 자다가, 머리에 쓴 두건을 흰 갓을 쓰고 손에는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꿈이 이상해서 점을 쳤더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이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입니다. 또 우물에 들어간 것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하고 풀이를 했다.
경신은 걱정이 되어서 그때부터 문 밖 출입을 삼갔다. 이즈음 아찬 여삼이 찾아왔다. 경신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여삼은 다시, 꼭 한번 만나야 한다고 간곡히 청해 왔다. 경신도 더 거절할 수 없어 들어오게 하였다. 여삼은 무슨 걱정이 있어서 두문불출이냐고 물었다. 경신은 꿈군 일과 해몽 점친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런데 여삼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절을 하고는 말했다.
“이 꿈은 정말 좋은 꿈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도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해몽을 하겠습니다.” 경신은 옆에 있던 자들을 물리치고 단 둘만 남게 되자 여삼에게 그 꿈이 어떤 꿈이냐고 물었다. “두건을 벗는 것은 위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그리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대궐에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한마디로 그 꿈은 왕이 될 꿈이옵니다.”
경신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라워서 다시 물었다. “내 주위에는 이찬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겠소” 여삼은 비밀리에 북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일러주었다. 경신은 그 말대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왕이 죽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때 김주원의 집은 북천 개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개천의 물이 불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는 틈에 김경신은 얼른 대궐로 들어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주원을 추대했던 중신들도 태도를 바꿔 새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김경신이 왕이 되니 바로 신라 제 38대 원성왕이다. 출전 : 『삼국유사』》헌덕왕(憲德王) 때에 이르러 무열왕계인 웅주도독(熊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은 앞서 선덕왕이 죽었을 때 왕위에 오른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내물왕계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부르고 한때 청주·충주·김해 등지를 장악하였으나 토벌되었다. 왕위의 쟁탈전은 흥덕왕(興德王) 이후에 더욱 격화되어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僖康王)을 살해하여 즉위하고 신무왕(神武王)은 민애왕을 살해하여 즉위(839)하였으며, 하대의 기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재위 1년 미만의 왕이 4명이다.
이와 같은 왕권의 불안정은 중앙의 행정체제를 뒤흔들어 귀족연립적인 정치형태로 변질되고 정치·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는 군진(軍鎭)을 근거로 한 해상세력이 등장하였다. 군진은 9세기에 들어 해적이 발호(跋扈)하면서 이에 대처해서 설치된 청해진(淸海鎭:莞島)·당성진(唐城鎭:南陽)·혈구진(穴口鎭:江華) 등인데, 이 가운데 완도의 청해진이 해상세력의 중심이었다.
청해진은 828년 당나라에서 활약하다 돌아온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것으로, 그는 1만의 병력으로 해적을 일소하고 해상권을 장악, 신라와 당나라·왜국 사이의 무역을 관장하여 해상의 패자(覇者)로 군림하였다. 그는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앞서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민애왕을 살해하여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등 막강한 실력을 행사, 그의 딸을 문성왕에게 차비(次妃)로 바쳐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히려다 실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자객에게 피살되었다.3. 후삼국의 성립과 신라의 멸망
왕권이 무력에 의해 유린되어 통치체제가 무너지자 지방에서는 새로운 호족(豪族) 세력이 형성되어 행정·징세권까지 장악하여 농민을 수탈하는 등 중앙의 경제기반을 잠식하였다. 진성여왕에 이르러 국정의 문란은 절정에 달하여 나라에서는 조세조차 거두지 못할 정도였고, 호족·군도(群盜)들에 시달린 백성들은 일본·중국 등으로 유망(流亡)하거나 사병(私兵)·도둑 등으로 변신하였다.
중앙의 정치적 부패와 통치권의 무정부상태에 따라 지방에서는 군호(群豪)가 나타나 북원(北原:原州)의 양길(梁吉), 죽주(竹州:竹山)의 기훤(箕萱)과 적고적(赤袴賊)·초적(草賊) 등이 무리를 지어 발호하였다. 이 중에서 전라남북도지방을 차지한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우고, 강원도 북부·경기도·황해도 및 평안도지방을 차지한 궁예(弓裔)는 마진국(摩震國)을 세웠으며, 신라의 세력은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차지하는 데 그쳐 이로부터 한반도는 얼마 동안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전개된다.
918년 후삼국 중 가장 강대하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의 신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자 신라의 경명왕(景明王)은 이를 기존국가로 인정하여 사신을 보내 수호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의 서울 경주까지 침범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잡아 자살하게 하고 왕제(王弟) 경순왕(敬順王)을 즉위시켜 신라의 국가적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935년 신라의 국토는 더욱 축소되어 민심은 고려로 기울어 나라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경순왕은 마지막 화백회의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서 그 절차를 밟았다.
고려의 태조는 경순왕을 정승(政丞)에 배(拜)하여 태자의 상위(上位)에 예우하고,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여 매년 1,000섬의 녹(祿)을 주었다. 이로써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56대왕, 992년을 이어온 신라의 사직(社稷)은 끝나고, 고려는 이 해에 후백제마저 병합하여 이로부터 한반도는 새로운 통일왕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 문헌
국역 경주읍지, 조철제 옮김, 경주시.경주문화원, 2003
경주시사(慶州市史) Ⅰ, 경주시사편찬위원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