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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문화재

경주의문화재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역사

옛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교육·사상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중 신라는 가장 후진성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7세기 이후에는 한반도의 원산만 이남 일대를 지배하게 된다. 통일신라의 핵심적 위치였던 경주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8세기~9세기는 신라문화의 찬란한 전성기였다. 신라의 화랑정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 후에도 한국인들의 정신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신라문화의 유산은 신라의 옛 터인 경주를 중심으로 폭넓게 산재해 있으며, 특히 유네스코가 세계 10대 유적 도시로 지정한 것으로 보아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그 유물의 종류와 가치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우리의 사상과 종교·학문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는데, 해동불교의 조종(祖宗)이라 불리는 원효(元曉), 의상(義湘)대사와 이두(吏讀)를 집대성한 설총(薛聰), 그리고 최치원, 김유신 등은 신라에서 배출된 인재들이다. 고려시대에는 비록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기는 했으나 경주는 여전히 전 왕조의 서울로 존중받았으며, 신라인들은 고려조의 다방면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의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한 최승로은 경주출신으로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갔으며,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손이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의 대가인 회재(晦齋) 이언적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교육기관을 세워서 유학교육에 전념하였다. 근대에는 우리 고유의 종교인 동학(東學)이 창시되었는데 그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도 경주인이다. 동학의 사상은 동학농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3·1운동의 근원적 추진력이 되었으며,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이 신라의 수도 경주 지역은 한민족과 한문화와 한국사가 형성한 거의 모든 분야의 뿌리이며, 문화 사상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경주 지역은 우리 민족의 역사 발전사에 있어서 ‘인재의 곳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교육 등 전반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오늘날 경주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물은 민족의 정신이 살아 있는 교육장으로 후손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진한시대의 경주
  • 경상도는 본래 진한의 땅이었고 후에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동국여지승람』】 진한은 마한(馬韓)【지금의 전라도 익산에 도읍이 있었다.】의 동쪽에 있었다.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 예국(濊國)【지금의 강원도 강릉】에 접하여 남쪽으로 변한(弁韓)과 이웃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은 진(秦)나라의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와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았다.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되, 자신들은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으로 진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한(韓)으로 오니, 한이 동쪽 경계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한다. 그래서 성책을 세웠다. 따라서 진한 사람들의 언어는 진나라의 사람의 말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혹자는 진(秦)과 한(韓)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진한은 그 곳에 마한 사람을 군주로 삼아서 마한을 견제했다. 진한은 대대로 서로 전승되어 왔으나 스스로 임금을 옹립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흘러 들어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진한 지역은 오곡을 심기에 적합하고 누에와 뽕나무를 많이 기르고, 베를 잘 짜고 소와 말을 타는 풍속을 가졌다. 시집이나 장가 들 때 예법을 지키고, 남녀가 유별하였으며 길을 가는 사람은 서로 길을 양보하며 걸었다 한다.

    신라의 모체는 진한(辰韓) 12개 성읍국(城邑國)의 하나인 사로(斯盧:慶州·月城)였는데, 사로국은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及梁),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沙梁), 취산(山)의 진지촌(珍支村:本彼),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漸梁),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漢祗),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 등 6개촌과 6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신라와 삼국시대의 경주
  • 1. 신라의 건국

    『삼국사기』에 의해서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BC 57년이 건국연대로 되어 있으나 사로국이 성립된 것은 이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는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곁에 있던 알 속에서 나온 아이인데, 고허촌장인 소벌공(蘇伐公)이 데려다 길렀다. 혁거세의 나이 13세가 되자 6부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호를 거서간(居西干:君長),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즉위 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았는데, 알영은 사량리(沙梁里)의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조의 난생설화(卵生說話)는 신라의 건국설화라기보다는 6부족의 연맹체인 사로국의 전설로 짐작되고 있다.

    《박혁거세, 알영 탄생 설화 :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각기 자기 자녀들과 함께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모두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모두가 안일하여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질서가 없다. 그러하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라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 때,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楊山)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은 더 잘 보기 위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 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말이 떠나자 촌장들은 그 말이 누었던 장소로 일제히 몰려가봤더니 그 곳에는 자줏빛의 큰 알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조심스럽게 깨뜨려보니, 그 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하며, 아기를 동천(東泉)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그러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기원전 53년 음력 1월에는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어떤 할멈이 보고서 이상히 여겨 거두어 키웠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그녀의 이름을 ‘알영’이라 지었는데,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났다. 박혁거세 거서간이 이를 듣고서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행실이 어질고 안에서 보필을 잘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두 성인(二聖)이라 일컬었다.
    혁거세는 무럭무럭 자라다가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갑자년(기원전 57년) 4월에 즉위,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니 이 때 나이가 13세였다. 혁거세는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그 나누어진 혁거세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었다. 이렇게 혁거세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그래서 무덤들을 가리켜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출전 : 『삼국유사』》

    유리이사금 9년(32)에는 육촌을 개칭하여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로,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로, 대수촌을 점량부(漸梁部)로, 진지촌을 본피부(本彼部)로, 가리촌을 한지부(漢祗部)로, 고야촌을 습비부(習比部)로 하고 각 부 촌장에게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정(鄭)씨, 배(裵)씨, 설(薛)씨의 성을 각기 부여하여 이들이 각 성의 시조가 되었다.
    서기 57년에는 유리왕이 죽자 선왕(先王)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유언에 따라 탈해(脫解)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이사금은 즉위 후 백제를 자주 공격했으며, 일본과는 화친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伽耶)와 싸워 크게 이겼다.

    《탈해이사금 탄생 설화 :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의 사람이다. 탈해의 아버지 함달파왕이 적녀국에 장가들어 그 왕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왕비가 회임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버리게 했다. 왕비는 비단과 아울러 보물 및 노비와 함께 챙기어 나무 상자를 만들어 배를 싣고 바다에 띄워 파도를 따라 흘려보냈다. 처음에 금관국에 이르렀으나, 바닷가 사람들이 괴이하다 하여 취하지 않았다. 다시 흘러 진한 아진포에 닿았다. 이 때 어느 늙은 할멈이 밧줄로 끌어 올려 나무 상자를 열어보니, 한 아이가 살아 이었다. 그래서 거두어 길렀는데 성장하자 신장이 9척이고 지혜와 식견이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 나무 상자에 실려 왔을 때 까치가 따라 오면서 울고 있어서 까치 작(鵲)자에 새 조(鳥)를 떼버리고 석(昔)으로 성씨를 삼았다. 그리고 나무 상자를 풀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라고 지었다. 탈해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아 할멈을 봉양하는데 있어 게으른 빛이 없었다. 할멈이 말하기를, “너의 골상(骨相)이 자못 뛰어나 보통 사람이 아니다. 마땅히 힘써 글을 배워 공명을 세우도록 하라”고 했다. 탈해는 마침내 학문에 정진하고 아울러 지리를 통달했다. 그가 양산 아래 호공의 집터를 바라보니 길지였다. 이에 속이는 계책을 써서 그 집을 빼앗아 살았다. 남해차차웅이 그의 어짐을 듣고 딸을 주어 사위를 삼았다. 출전 : 『삼국유사』》

    《김알지 탄생설화 : 탈해왕 9년(65) 봄 3월 밤중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始林) 숲 속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서,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가서 보니 금궤(金櫃)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보고하자, 왕이 사람을 시켜 금궤를 가지고 와서 열어보게 했다. 이에 작은 남자아이가 그 속에 있었는데, 모습이 기특하여 왕이 기뻐하며 측근 신하들에게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내려준 것이 아닌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는데 이에 이름은 알지(閼智)라하고 그가 금궤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은 김씨라 불렀다. 그가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혜와 계략이 뛰어났다. 닭의 기괴한 일이 있었다 하여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로써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알지는 뒷날에 대보(大輔)가 되었다. 출전 : 『삼국유사』》
    서기 261년에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이 되었는데 그는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사로국을 모체로 하였던 초기의 신라는 이렇게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 중에서 왕을 추대하고 이들이 주체가 되어 6부족의 연맹체를 이끌어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대륙과 멀리 떨어진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간헐적으로 경주분지에 정착한 유이민(流離民) 집단의 이질적 요소 등으로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발전하였다.

    《미추왕 설화 :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신라의 호국신으로 유명한데 이에 관한 두 가지 설화가 있다.
    첫 번째 설화는 다음과 같다. 14대 유리왕儒理王)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수도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전세는 점점 불리해 졌다. 그때 갑자기 귀에 대나무 잎사귀를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밀리고 있던 신라군에 합세하여 적군을 격파하였다. 적군이 물러간 후 그 이상한 군사들은 어디론가 자라져 찾을 수 없었는데, 다만 미추왕의 능 앞에 대잎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미추왕의 혼령이 도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추왕릉을 대잎 꽂은 병사가 나타났다 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두 번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37대 혜공왕 15년 4월 어느 날,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서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장군 차림을 하고 준마에 올라탄 사람이 갑옷과 병기로 무장한 40여 명을 이끌고 미추왕이 계신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속에서 울음소리와 함께 하소연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제가 살아서는 정사를 돕고 환난을 구제하고 나라를 통일한 공로를 세웠으며 지금 넋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며 재앙을 물리치고 환난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제 자손이 죄 없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지금 임금이나 신하들이 저의 공적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저는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는 나라 일에 힘쓰지 않겠으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소서.” 하소연하는 이는 다름 아닌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었다.
    미추왕은 김유신의 호소에, “나와 그대가 이 나라를 수호하지 않는다면 이 백성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부디 그대는 이전처럼 힘을 쓰도록 하오.”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장군이 세 번을 간청하였으나 왕이 끝내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김유신 장군의 무덤으로 되돌아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혜공왕은 두려운 마음에 즉시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게 하고, 장군과 연고가 있던 취선사(鷲仙寺)에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주어 장군의 명복을 빌었다. 미추왕의 영혼이 아니었다면 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니 왕의 호국이야말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나라 사람들은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그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었다 한다. 출전 : 『삼국유사』》

    기림왕(基臨王) 11년(308)에는 다시 국호를 계림에서 신라(新羅)로 고쳤다. 신(新)이란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롭다는 듯이고 라(羅)는 그 덕업이 사방에 그물처럼 펼쳐 미친다는 말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이라는 책에는, 신라 국호는 시조왕 이하로부터 사로라 하였고 탈해왕 이하는 계림이라 하였으며 기림왕 이하는 신라라고 한다. 그러나 세 가지 명칭 이외에 별칭이 많았다.】

    2. 신라의 발전

    4세기에 들어 내물왕이 거서간(居西干:제사장)·차차웅(次次雄:무당)·이사금(尼師今:계승자)으로 변천한 왕호를 마립간(麻立干:통치자)으로 개칭하고, 3성 중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고대국가의 실질적 시조로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제19대 눌지(訥祗), 20대 자비(慈悲), 21대 소지(炤知), 22대 지증(智證) 등 4대의 임금을 마립간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제17대 내물(奈勿)에서 22대 지증까지 6대의 임금을 마립간이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설을 따른다. 364년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오자 초우인(草偶人: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 기슭에 벌여 세우고, 용사 1,000명을 따로 부현(斧峴) 동쪽에 매복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분거(分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일축하였다.
    381년에는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에게 보내어 우의(友誼)를 맺은 뒤 중국문물 수입에 힘써, 이때부터 고구려를 거쳐 중국문화가 들어왔고 한자도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다음해 왜적 침입으로 서울이 포위되었으나 이를 물리쳤고, 395년에는 말갈(靺鞨)이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였다.
    내물마립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눌지마립간이다. 418년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볼모로 간 동생 복호(卜好)를 데려왔으며, 또 박제상(朴堤上)을 일본에 보내 볼모로 간 다른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박제상은 일본을 속이고 미사흔을 빼돌린 사실이 발각되어 잡혀 죽었다. 미사흔의 귀국 이후 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나 모두 막아냈다. 438년는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 백제에 원병을 보냈다. 눌지마립간의 재위 기간에는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박제상 설화 : 내물마립간 35년(390)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왕자를 한 사람 볼모로 요구하자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보냈으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 후 실성마립간 11년(412), 고구려가 화친의 뜻으로 왕자를 볼모로 요구하여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보냈으나 역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다음 대의 눌지마립간은 두 아우를 잃고 근심하다가 충신 박제상에게 그들을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데려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계략을 써서 미사혼을 신라로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붙잡혀 혹형을 받고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통곡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 벼슬을 추증하고 미사흔을 제상의 딸과 혼인시켰다. 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金堤上)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밖에 『삼국사기』, 『동국통감(東國通鑑)』,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출전 : 『삼국유사』》

    20대 자비마립간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경주의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였고(469), 소지마립간은 지방의 귀족을 중앙으로 흡수하는 한편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경주에 시장을 열어 물화(物貨)의 원활한 유통을 꾀하는 등 서정쇄신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동성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양국의 관계를 더욱 굳게 하였다(493). 지증왕 때에는 왕권강화와 내물왕계의 혈족결합을 전제로 왕위의 세습제를 확립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통치자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개칭하였다. 또 지방에 주·군·현(州·郡·縣)과 2소경(小京)을 두어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의 기반을 굳혔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어 실직주(悉直州)의 군주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울릉도)을 정벌하게 하여 이를 신라영토에 편입시켰다(512).
    죽은 뒤에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이것이 한국 시법(諡法)의 시초이다. 지증왕은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여 신라가 국가 체제를 갖추도록 하였으며 법흥왕은 이러한 지증왕의 업적을 토대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법흥왕은 율령(律令)을 공포하고(520),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528), 불교를 공인하고(527),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법흥왕 23년을 건원(建元) 원년이라 했다.(536) 또 병부(兵部)와 상대등(上大等) 등 새로운 관제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이룩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대가야국(大伽倻國:高靈地方)의 혼인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출가시켜 회유하였다. 524년에는 왕 자신이 남쪽의 경계를 순시하여 국경을 개척하였고, 532년에는 본가야(本伽倻:金官國)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이차돈(異次頓) 순교 설화 : 이차돈은 자는 염촉(厭觸)·염도(厭都), 거차돈(居次頓)·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증손으로서 법흥왕의 근신(近臣)이었으며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고, 벼슬은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재래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朝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신들의 의견에 반대,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던 끝에, 527년 순교(殉敎)를 자청하고 나서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언대로 그의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려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산(北山)의 서령(西嶺:金剛山)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절이 창건되었다. 헌덕왕 9년(817) 국통(國統)·혜륭(惠隆) 등이 그의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출전 : 『삼국유사』》

    법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지증왕(智證王)의 손자이며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로서 삼맥종(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라 불리는 이었다. 그가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인 죽령(竹嶺) 이북에서 고현(高峴:鐵嶺) 이남에 이르는 고구려 10군(郡)을 점령하였다. 또한 백제를 공격하여(553) 한강 유역의 백제영토를 전부 차지하여 이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신주(新州:漢山州)를 두었으며, 이로써 120년간 지속되어온 나제동맹은 깨어졌다. 진흥왕은 낙동강 유역에도 손을 뻗쳐 562년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게 되어 합천(陜川)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백제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동북 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안변(安邊)에 비열흘주(比列忽州)를 설치(556)하고 이원(利原)의 마운령(摩雲嶺)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신라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단양의 적성비(赤城碑)와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에 세워진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웅변하여 주고 있다. 이후 당항성(黨項城:南陽灣)을 거점으로 하여 중국(陳 ·北齊) 통로의 관문으로 삼았다.
    이어 진평왕은 관제의 정비에 힘써 위화부(位和府)·조부(調府)·예부(禮府)·승부(乘府) 등을 신설하여 관부를 직능별로 조직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수(隋)·당(唐)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진평왕 설화 : 진평왕은 신라 제 26대왕(579-632)으로서 성은 김씨, 이름은 백정(白淨)이다. 그의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579년 8월에 즉위하였는데 키가 11척(약 3m 30cm)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한다. 진평왕이 얼마나 거구였는지 그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루는 진평왕이 자신이 세운 내제석궁(內帝釋宮)이라는 절에 갔을 때였다. 돌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진평왕이 발을 내딛자 체중을 견디지 못한 섬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고 한다. 그러자 진평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라고 말했다. 아마도 자신의 장대한 기골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 후로 성안에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못하는 돌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때 부려졌던 돌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진평왕이 즉위한 해인 서기 579년 어느 날 하늘의 천사가 대궐의 뜰에 내려와서, “하늘에 계신 상제께서 왕께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천사의 말을 전해들은 진평왕이 꿇어앉아 공손히 옥대를 받으니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로 진평왕은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마다 이 옥대를 둘렀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며 신하들에게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니 신하들이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使玉帶)가 세 가지 보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고구려의 왕은 감히 신라를 공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출전 : 『삼국유사』》

    선덕여왕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침공을 본격화하였으며, 이로 인해 나 ·당(羅唐) 통로의 거점인 당항성도 크게 위협을 받았고, 백제는 대야성(大耶城:陜川)을 점령하여 백제와의 서부국경은 경산(慶山)까지 후퇴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유신을 압독주(押督州:慶山)의 군주로 삼아 대처하였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적극화하여 당에 유학생 ·유학승도 보냈다.

    《경주 황룡사 창건 설화 : 황룡사는 서라벌 장안에서 가장 큰 절이었고, 황룡사 구층탑은 가장 높은 탑이었으니 그 높이가 225척이나 되었다. 구층 기와집으로 된 탑 꼭대기에는 높이가 42척이나 되는 금빛 상륜이 꽂혀 있고, 상륜에는 금빛 풍경이 수 없이 달려 반짝이고 있었다. 또 층층의 지붕 귀마다 금풍경이 쨍그랑거리고 있었으니 황룡사의 구층탑은 신라 서울 사람들의 희망이고 또 기상이었다.
    황룡사는 처음 24대 진흥왕14년(553)에 착공하여 4년에 걸쳐 1차 공사가 끝났다 하는데 이때에도 법당 앞에 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서 말하는 구층탑은 643년 선덕여왕 때 착공하여 3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선덕여왕 5년(636년) 자장법사(慈藏法師)는 당나라로 유학하였다. 자장법사가 당나라 오대산에 갔을 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법사를 보고 말했다. “너희 나라 임금님은 원래 인도 왕실의 여자인데 이미 오래전 부처님의 계율을 받았으므로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 왕족들과는 다른 인연이 있다. 그리고 산천이 험준한 까닭으로 국민들의 성품이 거칠고 급한 데가 있어 사견을 많이 믿기 때문에 간혹 천신의 노여움을 살 때도 있다하나 나라 안에 다문비구(多聞比丘)가 있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평안하고, 만백성이 태평하리라”하고, 보살은 말을 마치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법사가 또 태화못 가를 지나려 하니 점잖게 생긴 한 노인이 나타나서 “무엇 하러 이곳에 왔소?”하고 물었다. 그러자 법사는 “불도를 구하러 왔습니다.”라고 정중히 대답했다. “그대 나라에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소?” 노인은 또 다시 법사에게 물었다. “우리나라는 북쪽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국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는데 이 나라들이 쉴 새 없이 국경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평안할 날이 없으니 그것이 걱정이옵니다”하는 법사의 말을 듣고, 노인은 “지금 그대 나라는 여자가 임금으로 나라의 일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소이다. 그 때문에 이웃 나라들이 얕보고 침략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니 그대는 하루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시오”하고 귀국을 권했다.
    “그러면 본국에 돌아가서 무슨 일을 하여야 하겠습니까?”하고 법사가 물었더니 노인은 “황룡사의 호법룡은 나의 맏아들이오, 법천왕의 명령을 받고 지금 황룡사에서 나라와 법을 지키고 있으니 그대는 돌아가서 황룡사에 구층탑을 이룩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나라의 위엄이 만방에 떨칠 것이며 인근에 있는 아홉 개 나라가 모두 조공할 것이오. 탑이 이룩되거든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들을 모두 놓아주면 감히 왜적들의 침략이 없을 것이오. 나라가 태평해지거든 우리 용들을 위해서 경기 남안에 정자 한 채를 지어 복을 빌어 주신다면 나도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 구슬 하나를 법사에게 주고,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643년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왕님께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선덕여왕은 곧 신하들을 불러 구층탑을 세울 방법에 대해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건축의 총 감독은 후일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춘에게 일임하고, 건축할 도목수는 건축예술이 발달한 백제에서 청해 오기로 했다. 신라에서는 많은 보물과 비단을 백제에 보내고, 권위있는 장인을 청했다. 백제에서는 건축가 아비지를 신라에 보냈다. 아비지는 200명이나 되는 부하 공장들을 거느리고 돌을 깎고, 나무를 다듬고, 기와를 구워 건축을 시작했다.
    찰주를 세우려던 전날, 아비지는 꿈을 꾸었는데 본국 백제가 망하는 것을 보았다. 아비지는 기분이 내키지 않아 일손을 멈추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컴컴하게 어두워지더니 크게 우레 소리가 나면서 법당문이 열리더니 노승 한 사람과 역사 한 사람이 나왔다. 노승은 역사를 시켜 탑 가운데 있는 심초석두에 찰주를 세워 놓고 사라져 버렸고, 날은 얼마 후에 다시 밝아졌다.
    아비지는 이탑을 세우는 일은 하늘의 명령이구나 하고 생각하여 마음을 다시 먹고 3년이나 걸려 탑을 완성하였다, 자장법사는 당나라 오대산 문수보살께 받은 사리 1백 개의 1/3을 황룡사 구층탑 찰주 밑에 넣고, 그 나머지를 통도사 계단과 대화사(大和寺) 탑에 각각 나누어 모셨다. 출전 : 『삼국유사』》

    《선덕여왕의 선견지명 :『삼국유사』 권1 『선덕여왕 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조에는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하는 신통력을 발휘한 세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여왕에게 당나라 태종(太宗)이 진홍·자색·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그 씨앗 3되를 보내왔다. 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씨앗을 뜰에 심게 했다. 과연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향기가 나지 않아 여왕의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개구리 울음을 듣고 전쟁의 조짐을 미리 알아차린 일화이다. 선덕여왕 5년(636) 겨울, 궁성 서쪽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에 많은 개구리가 모여들어 삼사일을 계속 울어대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병 2,000명을 데리고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며 쳐부술 것을 명했다. 각간 등이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가보니 부산(富山) 밑에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500명의 백제군이 숨어 있었다. 이에 이들을 모두 죽이고 남산에 숨어 있던 백제 장군 우소와 백제의 후원군까지도 모조리 쏘아 죽였다고 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여왕이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한 일화이다. 어느 날 여왕은 신하들에게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하라.”고 일렀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낭산(狼山)의 남쪽이라고 했다. 여왕의 말처럼 그 달 그 날에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낭산의 남쪽 양지쪽에 장례했다. 그 후 10여년 뒤에 문무왕(文武王)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선덕여왕은 자신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의 일을 알았는지 묻자, 여왕은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경인데, 여자는 음(陰)이며 그 빛이 희니 흰색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男根)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위의 세 가지 일화 중 ‘향기 없는 모란꽃’과 ‘개구리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다만, 모란꽃 이야기는 선덕여왕이 공주이던 시절에 아버지인 진평왕에게 말했던 것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개구리 이야기는 선덕왕 5년(636)에 여근곡이 아닌 옥문곡(玉門谷)에서 백제군사 500명을 섬멸한 것으로 적혀 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신라의 여왕제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겨 신라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명을 보내주어 신라왕으로 삼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며 신라 내에서도 여왕제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위의 이야기처럼 선덕여왕이 예지력을 갖춘 비범한 인물임을 강조함으로써 논란을 종식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비담의 난 : 명활산성은 천연의 요새로 수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 뿐만 아니라, 왕의 거성(居城)으로서 자비왕 18년(475) 정월부터 소지왕 10년(488)까지 13년간 왕이 이 곳에서 거처하기도 하였다. 자비왕 18년 당시의 국제정세가 신라에 불리하여 평지에 있는 월성에 있기가 불안했던 것 같다. 당시 백제는 왜국과 손을 잡고 있어서 왜구의 침략이 거듭되었고, 장수왕 치하의 고구려도 남하정책을 강화하여 신라에 압력을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산성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건으로 비담(毘曇)이 난을 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초에 상대등이었던 비담은 “여왕이 존재하는 한 나라가 옳게 다스려질 리가 만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보수적인 귀족세력의 대표 격으로서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왕군(王軍)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부대는 반월성에 본진을 두고 10여 일간 공방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비담의 무리들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외치자 그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선덕여왕은 이 소리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김유신 장군이 “길흉은 오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으며, 지(知)와 덕(德)이 요망한 것을 이길 수 있사오니, 성진(星辰)의 이변에 두려워하지 마시옵소서”라고 아뢰어 여왕을 안심시켰다.
    김유신 장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연에 매달아 띄워 올리니, 마치 불덩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이튿날 김유신 장군이 사람을 시켜 선전하기를, “월성에 떨어졌던 별이 어제 밤에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적군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또한 김유신 장군은 백마를 잡아서 별이 떨어졌던 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악이 선을 이기고 신하가 임금을 이기는 괴변이 없기를 기도하였다. 마침내 김유신 장군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명활산성에 주둔한 반란군을 총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출전 : 『삼국유사』》

    647년 비담(毗曇)·염종(廉宗) 등의 반란을 진압한 뒤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김춘추·김유신 일파는 진평왕의 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중앙 관제를 정비 개편하여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하고 좌 ·우 이방부(左右理方部)를 설치하는 한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인 상대등(上大等)을 상징적인 위치로 바꾸고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侍中)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귀족층에 의한 관직독점이 배제되는 등 권력구조에 변혁이 일어나 귀족연합정치가 무너지고 전제왕권이 성장하게 되었다.

    3. 신라의 삼국통일

    신라 진덕여왕 때 정권을 주도하였던 진골(眞骨) 출신의 김춘추가 상대등 알천(閼川)의 양보로 왕에 추대되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자 성골(聖骨) 출신의 왕계는 진덕여왕으로 끝나고 이로부터 진골출신의 왕계가 비롯되었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청원하여 나·당 연합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켰고(660), 문무왕은 백제의 부흥항쟁을 진압하는 한편 역시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무열왕과 문희의 결혼 : 제29대 태종대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왕으로서 김춘추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다. 각간 용수의 아들로,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세 딸 중 한 분이었다. 태종이 즉위했을 때 한 백성이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는 둘이고 다리는 여덟 개나 달린 돼지를 바쳤다. 점쟁이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천하를 통일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태종대왕의 부인은 바로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로, 두 사람의 결혼에는 김유신의 꾀가 크게 작용했다. 김유신의 누나 보희가 하루는,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서울 장안에 오줌이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 동생 문희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문희는 대뜸 그 꿈을 팔라고 하였다. 보희는 우스웠지만 문희가 비단치마를 내겠다며 졸라대니 별생각 없이 꿈을 동생에게 팔았다.
    그런 일이 있고서 열흘쯤 지난 정월 보름날이었다. 집에 놀러온 김춘추와 공차기를 하던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떨어뜨렸다. 유신은 옷을 꿰매주겠다며 춘추를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누이들 중 하나를 춘추와 맺어주려는 속셈이었다. 유신이 누나에게 춘추의 옷고름을 달아 달라고 하니 보희는, “어떻게 그런 하찮은 일로 처음 보는 귀공자 옆에 가겠는가?”하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동생 문희는 선뜻 나서서 옷고름을 달아주었다. 춘추는 동생과 인연을 맺어주려는 유신의 속내를 알아채고 그날부터 거리낌 없이 집으로 찾아와 문희를 만났다. 얼마 후 유신은 문희가 춘추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유신은 있는 대로 화를 내며 이웃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네가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임신을 하다니, 이 무슨 망측한 짓이냐? 집안을 욕되게 한 너 같은 계집은 태워 죽임이 마땅하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 서라벌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루는 선덕여왕이 궁궐 밖으로 나와 남산으로 행차하였다. 유신은 미리 알고 일부러 그날을 잡아 문희를 화형(火刑)하겠다며 마당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여왕이 남산에 올라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다가 이 연기를 보았다. 좌우의 신하들에게 무슨 연기냐고 물었다. 신하들은 소문에 들은 대로 말했다. “김유신이 그 누이동생을 태워 죽이려나 봅니다.” 여왕이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까닭을 물었다. “그 누이동생이 시집도 가지 않고서 임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 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라더냐?” 그때 앞에 있던 김춘추가 낯빛이 달라지며 고개를 돌렸다. 여왕은 눈치를 채고 힐책했다. “바로 네 소행이구나, 그런데 빨리 달려가 구하지 않고 여기 있단 말이냐?” 그제서야 김춘추는 황급히 달려가 말렸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은 곧 혼례를 올렸다. 이래서 동생을 춘추와 혼인시키려 한 김유신의 계획은 성공하였고, 문희는 언니에게서 꿈을 산 효험을 보았다.
    진덕여왕이 돌아간 뒤 왕의 이질(姨姪)뻘 되는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태종무열왕이다. 왕이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을 통일하여 신라에 더없는 공을 세웠으므로 태종대왕이라 했다. 태종대왕은 문희 부인과의 사이에 여섯 아들을 두었고 그 외에도 다른 부인에게서 난 네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또한 태종은 한 끼에 쌀 세말과 장끼 아홉 마리씩을 먹는 대식가로 유명하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부터는 점심을 거르고 아침, 저녁만 먹는데도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들었다. 태종이 다스릴 때 서울의 물가가 베 한필에 벼 30석 혹은 50석으로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노래하였다. 출전 : 『삼국유사』》

    그러나 당나라는 일방적으로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자국의 관리와 군대를 주둔시켰고, 신라마저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에 임명하였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는 등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획책하였다. 신라는 당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검모잠(劍牟岑)의 고구려 부흥군을 도와 당에 대항하도록 하였고, 또한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 이하 4,000여 호(戶)의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금마저(金馬渚:益山)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게 하는 등 영토의 잠식투쟁을 하였다.
    671년 신라는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泗省:扶餘)을 빼앗아 당군을 몰아내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675년에는 당의 20만 병력을 매소성(買肖城:仁川) 등지에서 섬멸하고 676년에는 서해를 통하여 소부리주·기벌포(伎伐浦:錦江下流)에 쳐들어온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부대를 격파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백제 멸망 후 16년간 존속하여온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게 되었고, 위축된 당나라의 세력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도 만주의 요동성(遼東省:遼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동강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선의 이남에 이르는 반도를 통치하게 된 신라는 역사상 최초의 단일 왕국에 의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어 이로부터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되었다.

    《김유신과 삼신녀 설화 : 화랑 김유신은 18세 되던 해 신임하는 낭도 백석과 같이 고구려의 비밀을 정탐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길을 떠나 어느 고개 위에서 쉬고 있노라니 두 사람의 예쁜 처녀가 나타나서 고갯길이 험해서 여자의 몸으로 가기가 두려우니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유신은 옷차림이 깨끗하고 상냥한 처녀들이라 기꺼이 허락하고, 처녀들과 같이 고갯길을 내려 와서 골화천에 이르러 골화관에 유숙했다. 이때 또 한 처녀가 골화관에 나타나서 함께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김유신은 세 처녀들과 재미나게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보내는데 처녀들이 나가더니 맛난 과일을 사 가지고 왔다. 과일을 먹어가며 이야기하고 지내는 동안에 서로 믿게 되어 김유신은 고구려로 가는 목적을 이야기해 버렸다. 그러나 세 처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벌써 알고 있었노라 하였다. 한 처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김유신에게 지금 백석이 자고 있으니 백석 몰래 우리들끼리만 저 숲속에 가서 놀다 오자하며 떼를 썼다. 김유신은 이왕이면 백석도 깨워서 함께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으나 세 처녀는 한사코 백석은 싫다 하므로 할 수 없이 세 처녀들만 데리고 숲으로 들어갔다. 세 처녀들은 김유신을 둘러싸고 말했다. “우리들은 금림, 용체, 골화 세 곳의 호국신이오. 지금 낭과 동행하고 있는 백석은 고구려 사람으로서 낭을 유인하여 고구려에 가서 해치려고 데리고 가는 것이오. 낭은 그것도 모르고, 따라만 가니 우리들은 그것을 알리려 이 곳에 나타난 것이오.”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세 처녀들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김유신은 깜짝 놀랐으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세 처녀들이 사라진 곳을 향해 여섯 번 절하고, 골화관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김유신은 백석을 보고 “내가 꼭 필요한 문서를 두고 왔으니 집에 돌아가서 그 문서를 가지고 다시 떠나자.” 하였다. 백석은 “그런 문서가 없더라도 비밀만 정탐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며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김유신은 백석을 데리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김유신은 백석을 옥에 가두고, 고구려에 가려던 이유를 물었다. 일이 폭로된 것을 깨달은 백석은 할 수 없이 사실대로 자백하였다.
    “나는 고구려 사람입니다. 고구려에는 추남이라 하는 음양학자가 있었는데 세상일들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날 고구려의 국경에 있는 한 강물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으므로 임금께서 추남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추남이 대답하기를 ‘이는 대왕님의 왕비께서 음양의 도를 바로 지키지 아니 했으므로 나타난 징조입니다’ 했더니 임금이 놀랐고 왕비는 대노하여 ‘이런 말은 그대로 믿을 수 없으므로 시험해 봐서 맞히면 몰라도 틀렸을 때는 중형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주장했습니다. 임금도 그럴 듯이 여겨 함 속에 쥐 한 마리를 넣어 가지고 추남에게 보이면서 ‘이 속에 무엇이 몇 개 들어 있는지 알아내라’고 하였습니다. 추남은 그 함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함 속에는 쥐가 들어 있는 데 모두 여덟 마리입니다.’하고 대답하였는데 임금은 쥐가 들어 있다는 것은 맞았으나 마리수가 틀린다 하여 추남에게 사형을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추남은 억울하게 죽어 가면서 ‘내가 죽은 후 반드시 다른 나라의 대장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야 말 것이다.’하고 숨을 거두었답니다. 임금은 추남을 죽이고, 함을 열어 봤더니 그 동안 쥐가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아 여덟 마리의 쥐가 들어 있더랍니다. 깜짝 놀란 임금은 추남이 과연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 어느 날 밤 추남이 신라의 장군 서현궁 부인의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임금은 더욱 불안하여 여러 신하들을 불러 논의하였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한결같이 ‘추남이 신라의 김유신으로 태어나서 억울하게 죽은 원수를 갚으려고, 고구려를 쳐들어 올 것입니다 자객을 보내어 한시라도 빨리 김유신을 제거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줄 아뢰옵니다’하며, 고구려의 자객을 신라에 보낼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그 건의를 받아들여 저를 자객으로 신라에 보냈습니다. 저는 그 임무를 다하려고 거짓으로 화랑도에 끼어 낭을 고구려로 유인하려 했던 것입니다.”라고 긴 사유를 말했다. 김유신은 백석을 처형하고, 음식을 갖추어 자신을 도와 준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였다. 출전 : 『삼국유사』》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 1. 통일신라의 발전

    통일신라는 전 시대보다 3배로 늘어난 영토를 조직적·능률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한 지배체제의 정비 및 개편과 새로운 문화 창조에 힘썼다. 이에 따라 왕경 경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왕궁과 그 주변의 제 시설에 대한 정비는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본격화되었는데 문무왕 14년(674)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나당 전쟁이 열기를 더해가던 시기 문무왕은 오히려 안압지(雁鴨池)를 조성하고 왕궁을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라 중대 왕실의 권위를 대내외에 천명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된다. 문무왕은 이 밖에도 사천왕사를 완성하고 남산성을 증축했다.

    《문무대왕과 민파식적 : 감은사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경주에서는 34km, 포항에서는 32km이다. 절터의 동쪽 동해바다 가운데 있는 대왕암이 바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30대 문무대왕의 해중릉(海中陵)이며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문무왕은 재위한 지 21년 만인 681년 세상을 떠났는데 늘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간(世間)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이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佛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라고 말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했고 신라의 강토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냈던 불세출(不世出)의 영주(英主) 문무왕은 동해구(東海口)에 가람(伽覽)을 세워 불력(佛力)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다. 그러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왕이 돌아 가셨으므로, 그의 유언(遺言)에 따라 화장(火葬)한 후 동해에 안장(安葬)하였던 것이다.
    일국의 군왕으로서 사치와 영화를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죽어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노고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화장하여 산골(散骨)할 것을 당부한 유조(遺詔)는 그 탁월한 인품을 짐작케 해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신이 신문왕을 거쳐 이후 경덕왕 대에 이르는 동안 신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융성과 번영을 누리고 찬란한 민족문화의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신문왕은 등극하면서 곧 부왕의 뜻을 받들어 선조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역사를 진행시켜 즉위하던 해(681) 절을 이룩하여 감은사라고 했다.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이 된 부왕이 조수(潮水)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감은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쌍탑(雙塔)이 배치된 전형적인 통일신라기의 양식에 따라 건축되었다.
    절을 낙성한 후 신문왕은 이곳에서 신비스러운 피리를 얻었다고 한다. 해관(海官)이 아뢰기를 “동해안에 작은 섬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합니다.”하였다. 왕이 이상히 여겨 점을 치게 했더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문무대왕과 김유신공의 두 성인께서 나라를 지킬 보물을 주실 징조입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이견대(利見台)에 가서 바다를 살폈다. 이튿날 산 위에 있던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컴컴해 지더니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자 용이 대나무로 된 피리를 바쳤다.
    그 피리를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며, 홍수 질 때는 비가 개었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효소왕 때에는 행방불명이 되었던 부례랑(夫禮郞)이 피리를 불자 살아 돌아왔으므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출전 : 『삼국유사』》

    신문왕은 중앙관부에 예작부(例作府)와 공장부(工匠府)를 설치, 당나라 6전(典) 조직과 비슷한 정무(政務)분담형식의 집사부(執事部) 이하 14관부를 완성하여 일원적 지배체제를 이룩하였다. 지방제도에 있어서는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그 밑에 군(郡)·현(縣)을 두었으며, 요소에 5소경(小京)을 두어 이곳에는 서울인 경주와 같이 6부제를 실시하고 왕이 때때로 순주(巡駐)하였다. 그리고 지방세력의 억제책으로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실시하고 689년에는 녹읍제(祿邑制)를 폐지하였다.
    신라는 통일 후 120여 년 간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 오늘날 안압지·임해전·포석정 등이 당시 상류사회의 호화로운 한 모습을 전하여 주고 있다.
    경덕왕 19년(760) 2월에는 궁중에 큰 못을 파고, 문천에 월정교(月精橋)와 춘양교(春陽橋)를 건설하였다. 이 무렵 왕경 경주는 당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하여 바둑판같은 도로망으로 짜여진 정연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경주의 논밭 사이의 둑이 정연한 것은 바로 그 도로망의 유구일 것임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왕도는 길이가 3,075보, 너비가 3,018보였으며, 35리와 6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진한조」에서는 신라 전성시대 경중(京中)에 178,936호, 1,360방, 55리, 35 금입댁(金入宅)이 있었다고 한다.

    《불국사·석굴암 창건 설화 : 김대성은 재상을 지낸 문량의 아들이었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생와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그는 경주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집 여자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죽은 날 밤 그는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전생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다 살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고 환생하여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한다. 이 설화는 당시 신라인에게 불교의 업보윤회사상(業報輪廻思想)이 많이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來世)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 출전 : 『삼국유사』》

    2. 신라사회의 모순

    경덕왕 시기는 통일신라의 최전성기이도 하지만 또한 몰락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경덕왕의 뒤를 이은 혜공왕대는 커다란 격동의 시기였다. 신라 진골 귀족들의 왕권도전이 표면화하여 혜공왕 4년(768) 김대공(金大恭)의 난을 시발로 96각간(角干)에 의한 반란이 3년간 계속되다가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金良相)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신라 하대의 첫 왕이다.

    《경덕왕 설화 : 경덕왕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니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어느 날 왕은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했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했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다시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경덕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왕(惠恭王)이다. 나이가 매우 어린 때문에 태후(太后)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죽음을 당했다.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한다. 출전 : 『삼국유사』》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족당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왕권의 강화책으로 골품에 의한 소수 귀족의 관직독점을 방지하고 관리를 인재 본위로 등용하기 위해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科擧의 일종)를 설치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는데, 이는 내물왕계의 원성왕이 왕위를 이으면서부터 무열왕계의 반격이 개시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원성왕 즉위 설화 : 원성왕(元聖王)의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으로 원래 이찬 김주원(金周元) 밑에서 각간 벼슬을 하였다. 하루는 김경신이 잠을 자다가, 머리에 쓴 두건을 흰 갓을 쓰고 손에는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꿈이 이상해서 점을 쳤더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이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입니다. 또 우물에 들어간 것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하고 풀이를 했다.
    경신은 걱정이 되어서 그때부터 문 밖 출입을 삼갔다. 이즈음 아찬 여삼이 찾아왔다. 경신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여삼은 다시, 꼭 한번 만나야 한다고 간곡히 청해 왔다. 경신도 더 거절할 수 없어 들어오게 하였다. 여삼은 무슨 걱정이 있어서 두문불출이냐고 물었다. 경신은 꿈군 일과 해몽 점친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런데 여삼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절을 하고는 말했다.
    “이 꿈은 정말 좋은 꿈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도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해몽을 하겠습니다.” 경신은 옆에 있던 자들을 물리치고 단 둘만 남게 되자 여삼에게 그 꿈이 어떤 꿈이냐고 물었다. “두건을 벗는 것은 위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그리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대궐에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한마디로 그 꿈은 왕이 될 꿈이옵니다.” 경신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라워서 다시 물었다. “내 주위에는 이찬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겠소” 여삼은 비밀리에 북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일러주었다. 경신은 그 말대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왕이 죽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때 김주원의 집은 북천 개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개천의 물이 불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는 틈에 김경신은 얼른 대궐로 들어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주원을 추대했던 중신들도 태도를 바꿔 새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김경신이 왕이 되니 바로 신라 제 38대 원성왕이다. 출전 : 『삼국유사』》

    헌덕왕(憲德王) 때에 이르러 무열왕계인 웅주도독(熊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은 앞서 선덕왕이 죽었을 때 왕위에 오른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내물왕계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부르고 한때 청주·충주·김해 등지를 장악하였으나 토벌되었다. 왕위의 쟁탈전은 흥덕왕(興德王) 이후에 더욱 격화되어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僖康王)을 살해하여 즉위하고 신무왕(神武王)은 민애왕을 살해하여 즉위(839)하였으며, 하대의 기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재위 1년 미만의 왕이 4명이다.
    이와 같은 왕권의 불안정은 중앙의 행정체제를 뒤흔들어 귀족연립적인 정치형태로 변질되고 정치·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는 군진(軍鎭)을 근거로 한 해상세력이 등장하였다. 군진은 9세기에 들어 해적이 발호(跋扈)하면서 이에 대처해서 설치된 청해진(淸海鎭:莞島)·당성진(唐城鎭:南陽)·혈구진(穴口鎭:江華) 등인데, 이 가운데 완도의 청해진이 해상세력의 중심이었다.
    청해진은 828년 당나라에서 활약하다 돌아온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것으로, 그는 1만의 병력으로 해적을 일소하고 해상권을 장악, 신라와 당나라·왜국 사이의 무역을 관장하여 해상의 패자(覇者)로 군림하였다. 그는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앞서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민애왕을 살해하여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등 막강한 실력을 행사, 그의 딸을 문성왕에게 차비(次妃)로 바쳐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히려다 실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3. 후삼국의 성립과 신라의 멸망

    왕권이 무력에 의해 유린되어 통치체제가 무너지자 지방에서는 새로운 호족(豪族) 세력이 형성되어 행정·징세권까지 장악하여 농민을 수탈하는 등 중앙의 경제기반을 잠식하였다. 진성여왕에 이르러 국정의 문란은 절정에 달하여 나라에서는 조세조차 거두지 못할 정도였고, 호족·군도(群盜)들에 시달린 백성들은 일본·중국 등으로 유망(流亡)하거나 사병(私兵)·도둑 등으로 변신하였다.
    중앙의 정치적 부패와 통치권의 무정부상태에 따라 지방에서는 군호(群豪)가 나타나 북원(北原:原州)의 양길(梁吉), 죽주(竹州:竹山)의 기훤(箕萱)과 적고적(赤袴賊)·초적(草賊) 등이 무리를 지어 발호하였다. 이 중에서 전라남북도지방을 차지한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우고, 강원도 북부·경기도·황해도 및 평안도지방을 차지한 궁예(弓裔)는 마진국(摩震國)을 세웠으며, 신라의 세력은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차지하는 데 그쳐 이로부터 한반도는 얼마 동안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전개된다.
    918년 후삼국 중 가장 강대하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의 신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자 신라의 경명왕(景明王)은 이를 기존국가로 인정하여 사신을 보내 수호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의 서울 경주까지 침범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잡아 자살하게 하고 왕제(王弟) 경순왕(敬順王)을 즉위시켜 신라의 국가적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935년 신라의 국토는 더욱 축소되어 민심은 고려로 기울어 나라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경순왕은 마지막 화백회의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서 그 절차를 밟았다.
    고려의 태조는 경순왕을 정승(政丞)에 배(拜)하여 태자의 상위(上位)에 예우하고,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여 매년 1,000섬의 녹(祿)을 주었다. 이로써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56대왕, 992년을 이어온 신라의 사직(社稷)은 끝나고, 고려는 이 해에 후백제마저 병합하여 이로부터 한반도는 새로운 통일왕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경주
  • 1. 고려초기 경주의 행정체제

    경순왕 김부가 태조의 부마가 되고 경주의 식읍과 막대한 세록을 받고 태자 지위의 위에 가는 관직을 받을 당시 신라의 문물과 인재가 모두 고려에 가게 되었다. 경주 역사상 전무후무한 획기적인 대사건이었다. 이때 고도로 발달한 신라의 문물제도는 고려에 의하여 계승되는데, 언어도 신라어가 고려의 언어로 계승되었다. 많은 신라의 인재가 고려에 가서 중앙의 핵심인물이 되었는데, 개국 일등 공신에 백옥삼(白玉衫), 배현경(裴玄慶), 국초 문병(文炳)을 관장한 최언위, 최승로 등과 불교계의 고승으로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 진공대사(眞空大師), 광학대덕(廣學大德), 능경(能競) 등은 태조의 불교 정책 뿐 아니라 일통삼국에 공헌한 고승들로 태조의 존경을 받았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이 나라를 내놓고 투항하자 국호인 신라를 없애고 경주라 개칭했다가 동23년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라 고치고 읍호(邑號)를 경주사(慶州司) 도독부(都督府)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안남도부서사(安南都府署使) 본영을 삼았다.
    성종 6년(995)에는 안동대도호부(경주대도독부)를 동경유수관으로 개정하고 동왕 14년에는 유수사(留守使)라 부르게 되었으며 영동도(嶺東道)를 관할하게 되었다.
    현종 3년(1012)에는 동경유수관제가 혁파되었다.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개칭되었으니, 관등이 강등되었던 것이다. 다시 현종 5년(1014)에는 안동대도호부로 개칭되고, 현종 9년(1018)에는 경주대도호부(慶州大都護府)로 개칭되었다.
    현종 18년에는 광평성의 첩(貼)으로써 12목(牧)을 개편하여 경주목으로 개편되었다. 현종 21년에는 다시 동경유수관으로 환원 개편했다. 그 이유를 『고려사』 57 「지리지」 제 11 지리 2 동경유수관 조에 그때 예방(銳方)이 올린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고려 삼경(三京)의 글이 있어 그 때문에 동경 유수관을 환원 복치했다.

    2. 무신 집정기의 경주

    무신 집정기에는 무신의 착취와 탄압에 신음하던 피지배 계급 농민, 노비 등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 중 동경에서도 민란이 줄기차게 일어났는데 신라 부흥을 표방했다는 점이 여타 지역의 민란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동경의 민란은 총 8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신종(神宗) 7년에는 상주, 청주, 충주, 원주 등지까지 격문을 돌려 동조하기를 선동하여 자못 그 기세가 커져갔다. 이에 반란한 동경유수관을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격하시키고 관내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 향(鄕), 부곡(部曲) 등의 관할을 상주, 안동 등에 뺏어 부속시켰다. 그러다가 고종 6년(1219)에 동경유수관으로 회복시켰다.
    고종 25년 윤 4월에는 몽고군이 동경으로까지 침입하여 그 유명한 대가람 황룡사를 불태웠다. 이때 황룡사의 금당과 그 안에 봉안했던 장육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9층 목탑과 49만근에 이르는 대종 등 한국 제1의 국보 사찰 황룡사와 국보급 문화재가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경주의 많은 문화재가 이때 약탈 또는 소실되었다.

    3. 고려 후기 경주의 행정체제

    경주는 충렬왕 34년(1308)에 계림부(鷄林府)로 개편 되었다. 그 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계림부로 존속되었다.
    신라시대의 경주(서라벌)는 수도였기 때문에 육부 외에는 별도의 관할이 있을 수 없었지만 고려시대는 경주 또한 하나의 지방 도시였으므로 당연히 일정한 영역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상고해 보지 않고는 당시 경주의 규모나 위상을 파악할 수가 없다 하겠다. 동경유수관의 관할은 영동도의 9주 35현이었다. 9주는 김주(金州:김해), 영주(永州:영천), 하주(河州:하양), 함주(咸州:함안), 밀주(密州:밀양), 예주(禮州:흥해), 울주(蔚州:울산), 양주(梁州:양산) 등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경주
  • 1. 조선전기 경주의 행정체제

    조선전기 경주는 경주부(慶州府)로 수령은 부윤(府尹)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경주부는 16세기까지 안강(安康), 기계(杞溪), 자인(慈仁), 신광(神光) 등 4개현을 속현(屬縣)으로, 구사(仇史), 죽장(竹長), 북안곡(北安谷) 등을 부곡(部曲)으로 다스렸다. 속현은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지방관이 파견되어 있는 주읍(主邑)을 통하여 중앙정부의 간접통치를 받는 곳이다. 속현은 점차 주현으로 승격되거나 면으로 개편됨으로써 17세기경에는 모두 소멸되었다. 부곡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양인신분이면서도 일반 군현제 하의 양인 농민층에 비해 추가적인 역을 부담하였다. 군현제 밑에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는 관리인 外官(외관)이 없는 자치조직으로 面里制(면리제)가 있었다. 지방의 자치조직으로 面(면) 혹은 坊(방), 社(사)가 있고 그 아래에 里(리), 村(촌), 洞(동)이 있었다.
    조선전기 경주부는 邑治(읍치), 직촌(直村), 任內(임내), 월경지(越境地)로 구역이 편성되어 있었다. 직촌은 읍치를 기준으로 하여 동·서·남의 3개면으로 구획하고 각 면은 다시 리, 동 혹은 방으로 세분하였다. 1669년에 편찬된 『동경잡기(東京雜記)』를 보면 읍내는 좌우도(左右道), 황오리(皇吾里), 성남(城南), 성내(城內), 사정(沙正), 황남(皇南)의 6개 방으로 구분하였으며 여기에 각각 검독관(檢督官) 1인, 유사(有司) 1인, 권농관(勸農官) 1인씩을 두었다. 그리고 속현인 안강현은 강동 3방, 강서 3방으로 합해 6방으로 되어 있으며 신광은 1방 기계는 3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월경지는 군현의 특수지역으로 소속읍의 구역 내에 있거나 또는 접경해 있지 않고 다른 읍의 영역을 뛰어 넘어 따로 위치하면서 소재지 읍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소속 읍의 지배를 받는 지역을 말한다.

    2. 조선전기 경주의 문화

    조선전기에는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고 발전하는데 여기에 크게 기여한 것이 영남학파(嶺南學派)였다. 조선전기 성리학이 영남 사림들에 의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의 학문적 배경이 다른 지역에 비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남지방은 고려전기 이래로 경주 최씨와 경주 김씨의 문신이 중앙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무신집권을 계기로 재경(在京) 문신들의 낙향 생활이 늘어남에 따라 영남지방의 문풍이 일찍부터 진작되었다. 영남학파 형성에 있어서는 경주의 손소(孫昭), 손중돈(孫仲暾) 부자와 이언적(李彦迪)의 역할이 지대했다. 손소 가문은 15세기 초에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부친인 손사성(孫士晟)에 와서 벼슬을 역임하기 시작하였다. 손중돈의 경우는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경주의 동강서원, 상주의 속수서원(速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언적은 어머니가 경주 손씨로 손소의 딸이었으며 양동에서 출생하였다.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오현(五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되는 대(大)성리학자였다. 이언적은 성리학 정립의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비록 사화(士禍)가 거듭되는 시련기에 살았기 때문에 그것의 희생물이 되기는 했지만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그것이다. 그는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3. 임진왜란의 발발과 의병의 활약

    조선전기의 경주의 행정체계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많은 변화를 맞게 된다. 선조 25년(1592)에는 경상도를 경상좌우도로 나누어 좌도 본영을 경주 본부에 설치했다. 그 해 다시 합하였고, 동28년 또다시 분도했다가 다음 해 역시 합하여 본영을 대구로 옮겨갔다.
    임진왜란 당시 경주에서도 왜군에 맞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선조 25년 1592년 4월 21일 영남의 거진(巨鎭)인 경주 읍성(邑城)을 함락 당했는데 관과 의병의 활동으로 같은 해 9월 8일 탈환에 성공한다. 경주성을 탈환한 것은 임란사에서 있어 큰 개가(凱歌)였다. 경주는 영남의 거진으로 전략상 요지일 뿐 아니라 주요 치소였기 때문에 이를 탈환함으로써 국토의 동로(東路)를 확보하게 되었다. 따라서 왜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게 되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이때 국왕은 국토의 끝 의주에 있었고 왜군은 평양성과 회녕까지 진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의병과 관군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자체의 결집된 힘만으로 왜군을 격퇴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경상좌도에 생기가 돌고 전세가 역전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전란 중에 군공청(軍功廳)을 두어 공신들의 명칭을 정하여 포상하였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국왕을 모신 호종공신(扈從功臣),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청난공신(淸難功臣), 그리고 전선에서 왜군을 물리쳐 혁혁한 무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 등 3등급으로 하였다. 선조 38년 4월에 선무공신에는 그 공과에 따라 다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을 두었다. 그리고 3등으로 나누어 전국에 모두 9,060명에게 공신록권(功臣錄券)과 함께 책으로 엮고 옥쇄를 찍어 각 개인에게 지급하였다.
    경주부의 평민으로 『선무원종공신록』에 등재도니 사람은 1등 13명, 2등 33명, 3등 63명 등 총 109명이나 되는데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4. 조선후기 경주의 행정체제

    조선후기의 지방행정제도는 본질적인 면에서 전기의 그것과 별 다른 큰 차이가 없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경상도 감영이 대구로 옮겨져 유영(留營)체제로 굳어지게 되면서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점이 경상도에서는 가장 큰 변화였다. 지배 영역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경주의 속현이었던 자인현이 인조 15년(1637)에 독립되어 나갔고 이어서 구사부국마저 효종 4년에 자인에 이속됨에 따라 경주의 지배 영역이 약간 축소되는 변화가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는 경주에 속하였던 진관(鎭管)의 범위도 약간 축소되었다. 동래현(東萊縣)이 부로 승격되면서 독립된 진으로 분리되어 나갔고, 이어서 기장현도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경주 진관의 관할지역은 군에서 부로 승격된 울산과 양산, 영천, 흥해 3개 군, 청하, 연일, 장기, 언양 4개현만이 남게 되었다. 그 후 양산조차 다시 동래 진관에 이속되어 경주 진관은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경주의 수령인 부윤은 조선전기 이래 종2품의 품계를 가진 자로 파견되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정 3품의 품계를 가진 자가 주로 파견됨으로써 격이 약간 낮아졌다. 경주는 안동과 함께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수령을 보좌하기 위한 판관(判官)이 따로 배치되어 파견되었다. 그러나 1670년경에 백성들의 부담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두 지역의 판관을 모두 혁파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경주는 그 전보다는 못하지만 경상도에서는 가장 높은 품계의 수령인 부윤이 파견되는 곳으로서의 위상을 의연히 가지고 있었다.
    고을의 격이 강상에 저촉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낮아진 적은 있었다. 효종 1년 속현인 기계현에 대립(大立)이라는 노비가 예천에 도망와서 살고 있다가 잡으러온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 바 있었다. 이로 인해 경주는 목으로 강등되었고 수령도 정 3품의 목사(牧使)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지방행정구역의 강등 조치는 보통 10년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10년 후인 현종 즉위년에 다시 부로 승격되고 부윤이 다시 임명되었다. 그 후 현종 6년에 또 다시 강상에 저촉된 사건이 일어났다. 서면(西面)에 사는 이만이(李萬伊)가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경주는 목보다도 한 등급 더 낮은 도호부(都護府)로 강등되었고 부사(府使)가 파견되었다.
    14년 뒤인 숙종 5년에는 고을의 격을 다시 부로 회복하게 되어 부윤이 파견되었다.

근대의 경주
  • 1. 동학의 발생

    조선후기 중앙정부에서는 경종·영조 집권 반세기가 넘도록 노·소 양론 간 혈투가 잇달았으며, 이와 같은 고질적인 당파 싸움이 이어지는 그 중에서도 경주는 당쟁 초기에 사림파의 중심이었고 노소 남북파 중 남인으로 남았으나 궁중세력을 등에 업은 노론세에 눌리면서 무서운 압박과 유혹도 끝까지 버티었다. 노론집권은 세도정치를 뜻하며 장기집권은 정치의 부패와 연결되어 백성을 착취하여 세력가에 바치고, 자기 배도 채우게 되었다. 이로서 쌓이고 쌓인 민중의 분노는 드디어 철종 3년의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전국에 민중궐기로 이어졌다.
    경주에서는 이 같은 민중운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보다도 민생문제의 근본 대책을 마련한 이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오직 하나의 종교인 천도교를 창시한 최제우였다.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崔濟愚)는 1824년 경주의 현곡면 가정리에서 몰락한 양반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36세 때 가정리 남쪽 구미산(龜尾山) 계곡에 있는 아버지의 정자인 용담정(龍潭亭)을 찾아가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도를 깨우치기 위해 매일같이 명상과 정신통일을 계속하여 마침내 득도하게 되었다. 최제우는 온갖 정신적 작업과 노력 끝에 종래의 유교, 불교, 도교를 종합하고 음양오행설, 역학사상, 풍수지리설, 영부신앙 등 각종 동양사상을 흡수해서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창도한 것이었다. 자신만의 새로운 도의 이름을 동학(東學)이라고 명명하였다.
    동학은 서양의 서학(西學)과 도(道)와 시운(時運)은 같고 학(學)과 리(理)만 다른데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지역과 문화였다. 그에 의하면 도는 천도(天道)로서 동일하다 할지라도 지구가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동학과 서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의 동(東)은 동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최제우는 새로운 도의 창시자인 자신이 동(東)에서 태어나서 동(東)에서 도를 받았으니 학(學)이 또한 동학이 된다고 하였다. 이 때의 동(東)은 동국(東國) 즉 조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동학을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했는데, 당파정치와 관원의 비리, 무능 부정부패와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 등 상하가 혼란의 극에 처한 정부에 대한 의존을 포기한 민중의 귀의로 전국의 방방곡곡에 번졌다. 그러나 귀족 세도정권은 이를 억압하기에만 급급했으므로 결국 고종 31년에 드디어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2. 대한제국 말기의 항일의병운동

    대한제국 말기 일본에 의해 나라가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경주도 마찬가지였다. 경주에는 처음부터 진위대 1대대를 비롯하여 일본수비대가 있어 그들이 가진 신예무기와 또 경주의 지리적 조건으로 의병운동은 매우 불리한 형편이었으나 이 지역 출신인 이한구(李韓久), 손영각(孫永珏), 박광(朴匡), 이석(李錫), 윤만파(尹萬波) 등은 전기한 인근 출신 의병장인 삼남의진(三南義陳)의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부자와 합작하여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장렬히 순절했다. 이 들의 순절 후에도 의병들은 동대산, 보현산, 운문령을 중심으로 항쟁을 계속하였다.

    3. 근대 경주의 행정체제

    고종 32년(1895) 행정구역을 8도(道) 체제에서 23부(府) 체제로 대대적으로 개편하였을 때, 경주는 경주군으로 개칭되어 대구부(大邱府)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13도 체제로 복구되었을 때 경주군은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 외남면이 경상남도 언양군으로 이속되어 경주의 영역이 약간 축소되었다. 1906년에는 동해면에 해당되는 감포, 양북, 양남이 장기군으로, 기계, 신광면이 흥해군으로, 죽장면이 청하군으로, 북안면이 영천군으로 각각 이속되어 경주군의 영역은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이 단행될 때 양남과 양북이 경주로 환원되었다.

일제시대의 경주
  • 1. 경주의 민족해방운동

    일제의 침략과 탄압이 심해지자 이에 맞선 거국적 항거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한말의 의병전쟁이나 계몽운동이나 교육운동으로 축적된 민족 역량의 표출이며, 1919년 이후의 민족광복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기도 했다.
    경상도에서는 기미년 3월 4일에 대구에서 처음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어 은밀히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경주에서는 이에 앞서 유지 투사들이 광복회 및 기타 사건으로 거의 다 투옥되었고, 일경의 경계가 삼엄하여 일어나려는 군중이 서로 연락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동년 3월 13일의 만세시위 계획이 강제해산으로 무산되고 3월 15일에 경주읍 시위가 감행되었다. 이 때 박문홍(朴文泓), 김철(金喆), 김성길(金成吉), 최성렬(崔聖烈), 최수창(崔壽昌), 최기윤(崔基潤), 박영희(朴永熙), 박봉록(朴鳳錄), 김억근(金億根) 등 인사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감금을 당했다.
    3.1운동 전에는 경주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인 최준, 박상진(朴尙鎭), 최완(崔浣) 등이 전국적 조직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에 입단하여 서상일(徐相日), 이시영(李始榮)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4월 초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일만 오천원을 모금하여 송금했다. 동년 가을에 동지의 고발로 탄로났는데, 이 사건이 소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중앙총본부사건(中央總本部事件)’이다. 이 사건 이후에도 최준 지사는 경주 인근의 뜻있는 지사들과 조선 독립운동의 사상 고취와 군자금 모금에 힘썼으며 점차로 심해지기만 하는 일제의 착취에 허덕이는 가난한 동포의 억울한 일들에 대하여 관에 항거하고 주변 백성들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은 데에 주력했으며 이를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 이와 같은 활동이 이 지방에서 계속 이어져갔다.
    일제의 압제가 혹독할수록 그 억압에 대한 저항 또한 민족의 숙명이었기에 크고 작은 항일은 계속되었다. 한 예로 1920년대 후반기 일제유화정책에 따라 시행된 문화정치의 여파로 경주에 신라제(新羅祭)라는 제전을 열게 되었다. 시작은 신라문화의 찬란한 위업을 기리고자 하는 경주인들의 염원을 풀어내는 것으로, 1933년 8월 17일에 개최되었다. 이것이 훗날의 신라문화제로 발전되었지만 그 당시는 별칭이 진한육부촌장제(辰韓六部村長祭)라 했다. 그 장소는 황성 숲이었다. 그렇지만 그 준비는 대략 행사내용에 따라서 숭혜전(崇惠殿), 숭덕전(崇德殿), 숭신전(崇信殿), 기타 육부촌 등 전설, 설화를 재현하고 민속, 향토, 풍속을 지역에 따라 집결하여 출발하게 되는데 그 신위를 일본 태신궁 경주요배소(경주신사)에서 안치·배향하게 했다.
    이 행사를 본 이칠성(李七星, 당시 양정고보 4학년)이 신라의 거룩한 신을 일인(日人) 신사에 안치·배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봉축이라고 표시된 일본식 초롱을 태질하여 불태운 사건이 있었는데 ‘사상이 나쁘다’ 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명목으로 구류를 살고 학교에서는 퇴학조치 당했다. 이와 비슷한 사소한 사건들이 많았으며 1930년대 후반에는 점차 제 2차 대전의 가속으로 전쟁열풍이 몰아쳐 사람의 강제징용에 이어 유기(鍮器)의 공출징수, 애국헌금의 징수 등으로 민심이 더욱 흉흉해졌다.
    1940년대 초에 이르자 전국의 지식인층, 학생층에서 항일학생 비밀결사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경북 대구를 중심으로 사범학교, 대구고보, 대구농림, 대구상업, 안동농림 등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불을 지폈으며 경주에서도 경주중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불길이 솟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한층 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 1944년 1월에 조선독립회복연구단(朝鮮獨立回復硏究團)이 안동농림학교의 몇몇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일본의 한국 식민지 통치기구를 파괴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이와 같은 항일 결사의 조직과 비밀 단체 조직은 끊임없이 결성되었지만 패망의 광기에 다다른 일제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고 중국임시정부나 만주 등의 독립운동기구와는 닿지 못하여 강제해체되곤 했다. 그렇지만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적 의기는 결코 식지 않았다.

    2. 일제시대 경주의 행정체제

    경주군은 일제시대 초반 경상북도 하에 있으며 군수 하에 군속 12명, 군기수 2명, 산업기수 7명, 삼림주사 1명, 지방서기 1명, 고원 14명, 학교비 서기 2명, 계 39명의 직원이 있었다. 서무계와 재무계는 둘로 분리되어 서무계 주임, 재무계 주임을 군속 중에서 임명했다. 군수는 대체로 한국인 중에서 채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형편에 따라서 일본인을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1년 4월 1일 제령 12호에 의한 읍면제 실시에 따라 경주면은 경주읍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또 1937년 7월 1일에 양북면 감포리 외 인근 8개 리를 합하여 감포읍으로 승격하여 경주군은 2읍 11개 면으로 편성되었다.

해방 후에서 현재까지의 경주
  • 1948년 7월 17일에 남한 만의 자유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되고 동년 8월 15일에 신헌법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비록 사회는 소연했지만 5월 20일, 대통령령 제 99호로 경주군 강서면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55년 7월 27일 경주군 갑구 출신 국회의원 김철의 발의로 경주시 설치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그리하여 동년 8월 13일 법률 제 370호의 포고로 종래의 경주군 중 경주읍 및 내동면의 전부와 내남면의 탑리와 천북면의 황성, 동천, 용강 3개리를 합하여 경주시로 승격하였고 그 나머지 부분을 월성군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1973년 7월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0년 12월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월성군의 명칭이 경주군으로 환원되었다. 1995년 1월 경주시와 경주군이 합쳐 통합시가 되었다.
    2003년 현재 경주시는 감포읍, 안강읍, 건천읍, 외동읍 및 양북면, 양남면, 내남면, 산내면, 서면, 현곡면, 강동면, 천북면과 중부동, 성동동, 황오동, 성건동, 황성동, 용강동, 동천동, 황남동, 보덕동, 월성동, 탑정동, 불국동, 선도동 등 4읍 8면 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 문헌
국역 경주읍지, 조철제 옮김, 경주시.경주문화원, 2003
경주시사(慶州市史) Ⅰ, 경주시사편찬위원회, 2006